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악바르 대제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||[[파일:악바르 인도.jpg|width=380]]||[[파일:external/ifonlypolyglotwasajob.files.wordpress.com/01_fatehpur-sikri_mar11-20.jpg|width=586]]|| ||1571 ~ 1585년간 제국의 수도였던 파테푸르 시크리.[* 사원의 정문인 불란드 다르와자는 구자라트 원정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의 용도를 겸한다.] ||파테푸르 시크리의 전경 || * 수도인 파테푸르 시크리 건설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. 악바르는 늦게까지 아들을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차에 모처에서 성자를 만나 예언을 얻었다. 이후 라지푸트족 공주 마리암 우즈 자마니로부터 아들 [[자한기르]]를 얻게 되어 기뻐한 악바르는 그 예언자를 기념하여 아그라 인근에 새로운 수도로 파테푸르 시크리(Fatehpur Sikri) 를 건설했다고 한다. 하지만 물도 떨어지고 악바르도 본격적인 전쟁을 위해 라호르로 천도를 하게 되어 도시는 버려졌다.[* 물론 학계에서는 파테푸르 시크리가 버려진 것도 아니고 성자를 기념하려고 지은 것도 아니라고 본다. 파테푸르 시크리는 악바르가 죽을 때까지 중요한 도시였고, 수도를 새로 지은 이유는 라호르와 델리 등 대도시들 간의 수도 경쟁을 완화하고 인도 중부의 정복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.] 수도로 기능한 것은 불과 10여 년이었지만 건축물은 남아 파테푸르 시크리는 [[유네스코 세계유산]]이 되었으며 악바르의 무덤도 이 곳에 있다. * 동시대에 우리나라는 [[조선]]의 [[명종(조선)|명종]]과 [[선조(조선)|선조]]를 거치며 수난을 겪고 있었으며, 중국은 [[명나라]]의 [[만력제]]가 통치하며 막장화를 보였다. [[영국]]에서는 [[엘리자베스 1세]]가 영국의 전성기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. 오스만 제국은 이 무렵 [[쉴레이만 대제]] 치하에 역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. 악바르와 쉴레이만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거나 사절을 보내는 등 교류를 하였으며, 악바르 시대에 인도에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 포르투갈에 맞서는 문제에 대해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. 이슬람권의 서쪽과 동쪽에 두 대제가 공존한 16세기 후반은 이슬람 역사에 있어 압바스 왕조 이후 최대의 전성기로 평가받는다. * 상술했듯 그는 라지푸트족의 공주들과 혼인을 했는데 이들 중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앙베르 왕의 딸이자 [[자한기르]]의 어머니인 마리암 웃 자마니이다. 단 마리암 웃 자마니는 악바르가 하사한 명칭으로 출생시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히라쿤와리, 하카 바이, 조다 바이등 다양한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. 이중 가장 대중적인 이름은 '조다 바이'지만 현 역사학계에서는 앙베르 왕과의 연관성보다는 조다푸르와의 연관성이 깊은데다 악바르와 조다푸르 공주와의 결혼이 맺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고 대신 자한기르의 아내의 이름으로 여겨지고 있다. * 한편 그녀와 악바르의 결혼은 사실상 무굴 제국의 종교 및 사회 정책의 점진적인 변화와 악바르 대제의 포용정책의 사례로 평가되며 이 이야기를 소재로 한 [[발리우드]] 영화가 바로 조다 악바르(2007)이다. [[리틱 로샨]]이 악바르 역을 맡았다. * [[물담배]]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데, 영국을 통하여 무굴 제국이 담뱃잎을 얻은 이후 악바르 대제의 궁정 의사였던 '아불파스 길라니'(Abu'l-Fath Gilani)가 현대적인 형태의 물담배를 발명했다. * [[노빈손 시리즈]] 인도편에서도 마리암과 결혼하기 위해 노빈손과 좌충우돌 모험을 한다.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결혼했던 실제 역사와는 달리 힌두교를 믿는 나라에 갔을 때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 스토리가 추가되었다. * 치세 동안 종교인들 간의 토론을 지켜보는 걸 즐겼는데[* 대표적인 정복군주로 꼽히는 징기스칸 또한 타종교에 관용적이고, 종교인들끼리의 토론을 즐긴데서 둘의 묘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.] 델리에서 이를 목격한 한 포르투갈 신부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남겼다고 한다. 그가 종교적으로 대단히 보수적이었던 당대 천주교 사제라는 점을 감안하자. >"[[무신론자]]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을 그 왕도 범하고 있다. 이성을 신앙의 밑에다 두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는 문제를 불완전한 이성으로 처리하면서 자기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" 그리고 이에 대해 [[자와할랄 네루]]는 저서인 《[[세계사 편력]]》에서 "만약 이것이 무신론자의 정의라면 우리에겐 무신론자일수록 좋다"라며 호의적인 평가를 남겼다. * 그리고 인도지역에 타민족이 세운 제국의 황제중에서 위대한 성군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청나라의 [[강희제]]와 비견된다. [[강희제]]와 악바르 1세는 타민족의 황제인데 자신을 보좌하였지만 반란을 일으킨 오오바이나 바이람 칸을 죽이지 않고 유페시킨 점과 청나라의 영토를 확장시킨 점과 피지배민족인 한족이나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는 점이다. 그리고 후계자인 아들인 [[자한기르]]와 [[옹정제]]는 유능한 행정가이면서 아버지의 통치방식을 이어받아 제국의 통치를 수성을 잘했다는 점과 손자인 [[샤 자한]]과 [[건륭제]]를 어릴적 총애했다는 점과 그 손자가 애처가인 점과 전반 통치와 비슷하고 [[건륭제]]의 후반통치는 증손자인 [[아우랑제브]]와도 비슷한데 자주 원정을 일으키고 전비지출과 부정부패와 소수민족탄압등 제국의 멸망의 씨앗을 남긴 점과 비슷하다. [각주] [[분류:무굴 황제]][[분류:1542년 출생]][[분류:1605년 사망]][[분류:신드 주 출신 인물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